실상사의 뒷간. 오른쪽 안내문은 뒷간의 환경적 중요성을 설명한 것이다.

뒷간의 내부

“인드라망은 이곳에서 시작됩니다.”

왕영술 한생명 사무국장은 기자를 실상사 경내에 있는 뒷간으로 먼저 안내했다. 실상사 뒷간은 변소다. 절간에 있는 변소, 물론 수세식은 아니다.

“이 화장실에서 소변과 대변은 분리되어 수집됩니다. 대변은 발효시켜서 거름으로 쓰고, 소변은 완벽히 정화합니다. 정화된 물은 마셔도 될 정도입니다. 이 정화된 물을 사 가는 사람도 있죠.”

왕 사무국장은 실상사의 첨단 분뇨처리 시설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상사 주지스님인 도법스님이 귀농학교를 구상하고, 친환경농업을 실천하고자 하면서 이런 화장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상사 절 입구의 안내표지. 뒷편은 실상사 농장이다.

왕 사무국장과 함께 절 입구로 나섰다. 실상사를 표시하는 푯말 주변으로 연못과 논이 펼쳐져 있다.

“이곳이 실상사 농장입니다. 귀농학교의 실습장이기도 하고, 일부는 인드라망 공동체에 속한 각 단체들이 농사를 짓는 곳입니다.”

농장이라고 해서 특별한 구역표시가 되었거나 울타리가 쳐진 것은 아니었다. 실상사 정문 앞과 옆에 있는 논밭이 전부였다. 모두 3만평 정도 된다고 한다.

실상사 농장은 친환경 농업으로 짓는 땅이다. 이곳의 땅은 농약과 화학비료로 오염될 일이 없다. 실상사 주변의 논은 우렁이농법이 시행 중이었다. 논 이곳저곳에 고동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모를 제외한 잡초를 모두 먹어치우는 우렁이였다. 농사에 별도의 제초제는 필요 없다.

“귀농학교를 거쳐간 사람이 340명인데, 무주에 정착한 사람이 250명 됩니다. 이곳 남원시 산내면 인구가 2천5백명입니다.”

남원시는 전라북도에서 인구가 매년 증가하는 유일한 기초지자체이다. 이처럼 인구가 늘어나는 농촌 지자체는 전국적으로도 거의 없다고 한다. 귀농학교를 시작한 지 10년이 되었다. 어느듯 10년 농사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혹시 절에서 귀농하는데 필요한 자금 같은 것은 지원해 주나요?”

유치한 느낌은 들었지만 궁금하니 물을 수밖에 없었다. 실상사라면 신라시대로부터 내려온 유명 사찰이니 귀농자금 같은 것도 있지 않을까?

“귀농자금은 자기가 알아서 마련해야 합니다.”

자금을 자신의 힘으로 마련해야 한다면 귀농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귀농을 위해서는 도시생활에서 누리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리라.

“귀농을 결심하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실제 귀농하기까지 정리해야 할 것이 많겠군요.”

“그렇죠. 귀농을 한다는 것,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철학적인 문제입니다.”

철학적이라는 말은 수많은 것을 함축한다. 도시를 포기하고 농촌에 정착한다는 것은 생활의 변화를 의미한다. 어쩌면 지겨운 일상의 연속이 될 수도 있으리라.

바쁘고 찌든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농촌으로 쉽게 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가장 마음에 걸리는 문제는 자녀들의 교육이 아닐까라고 물었다.

“그렇죠. 그밖에도 고려할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막연히 농촌생활이 좋다고 해서 올 것이 아니라 전략을 잘 짜야 합니다. 가족의 일부만 먼저 와서 귀농하는 사람도 있고, 반농반작(농사도 짓고 다른 일도 하는 것)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시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잘 벌어도 한 달에 60만원입니다. 서울에 있는 친척의 경조사에 세 번만 달려가면 그 돈이 다 달아나죠.”

“실상사에서 귀농교육을 받고 이 부근에 정착한 분이 많다고 했는데, 농촌 특유의 텃세 같은 것은 없을까요?”

“그건, 새롭게 온 사람이 지역에 잘 녹아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농촌에서는 혼자 살 수  없습니다. 농촌 어른들은 게으른 사람에게 나무라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어려운 이웃이 있다면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농사가 잘 안 되는 집이 있으면 그 집 마루에 작물을 몰래 조금씩 놓아두고 가기도 합니다. ”

마을 위쪽에 큰 집을 짓고 혼자서 전원생활을 즐기려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집으로 들어오는 진입로도 멋지게 포장을 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그 잘 포장된 길을 그 집 뒤편에 있는 과수원으로 가는 농로로 사용했다. 사람들이 번다하게 드나드니 마을과 동떨어져 살고자 하는 의도가 빗나간 것은 물론이다.

실상사 작은학교 터

실상사농장을 가로질러서 작은 공터가 보이는 곳에 갔다. 공터에는 컨테이너 건물이 몇 개 있고, ‘실상사 작은학교’라는 페인트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젊은 귀농인들이 산내면으로 몰려들자 그들의 자녀를 위한 교육기관이 필요했다. 물론 그 교육기관은 입시와 경쟁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자연과 놀이를 체험하는 공간이어야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실상사 작은학교이다. 초기에는 초등학교 과정이었지만 지금은 중학교 과정으로 운영하고 있다. 컨테이너로 지은 가건물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학교였다. 이 학교는 이제 실상사 옆에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작은학교 터에 있는 원두막으로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나눴다.

“도농연결을 잘 해서 자급적 구조를 만들면 농업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농촌 한 가구가 도시의 열일곱 가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도농직거래 말이군요. 이론은 좋지만 현실적으로는 생각할 점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도시 사람들이 농촌의 현실을 잘 알아야죠.”

이곳 실상사에서 생산되는 채소를 도시에서 판다면 어떨까? 우선 이 작물은 친환경농법으로 지은 작물이니 가격이 비싸서 구입하기를 꺼릴 것이다. 그리고 상추마다 벌레가 먹어서 구멍이 쑹쑹 뚫려있으니 괜찮은 상품 구실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왕 국장은 농약을 안 쓰는 농사가 무조건 좋다고 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농촌에 나이든 사람들밖에 없는데, 그들이 농약을 사용하지 않으면 농사를 짓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왕 국장의 말을 듣다보니 도시와 농촌간에 커다란 장벽이 놓여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지금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농촌에서 이주했거나, 설령 도시가 고향이라 하더라도 그곳 또한 농사를 짓던 곳이 아닌가? 그렇지만 사 오십년간의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이제는 도시인들이 농촌의 현실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도시 사람들과 농민들간의 교류가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최근 지리산 트레킹이란 프로그램이 생겼습니다. 지리산 부근을 걸으면서 명상도 하고, 체험도 하는 프로그램인데, 그 트레킹이 이곳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를 보면, 어떤 사람들은 쓰레기를 마구 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양주병을 아무데나 버려요.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일하시는데 이렇게 놀러 와서 미안합니다’라고 합니다. 약간의 부작용은 있지만, 이런 기회를 통하여 도시인과 농민들이 서로 이해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멀리서 본 실상사 주변. 오른쪽은 실상사 작은학교 터이며, 비닐하우스 부근은 실상사 농장이다.

 

왕 국장은 한생명에서 일하기 때문에 누리는 즐거움 가운데 실상사의 훌륭한 스님들에게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을 들었다. 

실상사는 통도사나 해인사와 같은 대규모 사찰이 아니다. 그렇지만 실상사에는 절 규모에 비하여 많은 편인 40여명의 스님이 수행하고 있다. 이 스님들은 실상사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모인 학승들이다.

실상사가 유명한 것은 이 절이 배출한 훌륭한 스님들 때문이기도 하다. 주지스님인 도법스님과, 지금은 화계사 주지로 있는 수경스님 같은 분들이 그러하다.

속인의 입장에서 이 스님들의 이름을 들을 기회가 많았던 것은 그 분들의 환경을 지키기 위한 실천, 그리고 사회적 활동 때문이다.

수경스님은 해인사의 대불조성 공사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해인사 스님들의 공격을 받은 바 있고, 새만금 간척을 반대하는 삼보일배에 참가한 적도 있다. 도법스님은 지금도 전국을 순회하며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실상사 출신 스님들의 이런 활동은 수행승이라는 이미지와 잘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하는 스님은 고적한 산사에서 면벽수도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 아닌가? 저자거리의 수행승이라니!

이런 의문에 대해서 도법스님은 여러 차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바 있다.

다음은 안철홍 저 ‘ 다시 희망을 묻는다-실천하는 지성 11인의 삶과 꿈’에서 부분적으로 발췌한 도법스님의 말이다.

                               도법스님 (출처 : Kyunghyang.com)

                           

“수행에 대한 우리의 관념 자체가 편협하고 왜곡되어 있는데, 참선하는 것만이 수행은 아니죠.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기는 모든 것이 수행입니다.”

“저는 근본주의자도 아니고 득도한 사람도 아니지만, 오늘날 한국 불교를 보면 현실사회로부터 너무 벗어나서 관념화되어 있어요. 저는 득도란 게 그런 관념적인 건 아니라고 봐요.”

도법 스님은 ‘화엄의 길, 생명의 길’이라는 책에서 노루와 나무꾼 얘기에 대한 생각을 적었다. 사냥꾼에게 도망쳐서 피신한 노루를 살리기 위해 나무꾼은 거짓말을 했다. 과연 나무꾼의 행동은 옳은 것일까?

도법스님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한다. 그건 목적만 좋다면 방법은 틀려도 된다는 적당주의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단하지요. 사냥꾼을 붙잡고 설득해야지요. 물론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면 그렇게 해야지요. 우리는 너무 쉬운 길로만 가고, 국면만 모면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치열하고 근원적인 태도만이 생명도 살리면서 진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한생명 매장. 실상사 절 입구 매표소 옆에 있다. 매장 뒷편으로는 어린이집과 한생명 사무실이 있다.

 

인드라망은 도법스님의 생각이 현장에 투영된 모습이다. 도법스님이 쓴 ‘인드라망 세계관과 삶의 실천’이라는 글에 의하면 인드라망은 화엄경에 나오는 구슬 그물이다.

제석천에는 무수한 그물이 있어서 이쪽 구슬은 저쪽에 투영되고, 남쪽 구슬은 북쪽 구슬에 투영되고, 인간의 구슬은 자연에 투영되고, 시간의 구슬은 공간에 투영된다는 것이다,

‘나’라는 개인도 이러한 투영되는 네트워크 속의 일원이다. 인드라망은 인간을 존재하게 하고, 생명을 유지하게 만드는 네트워크이다.

전북 남원의 실상사를 중심으로 한 인드라망 공동체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전망이자 그들을 잇는 연결망이 된다.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는 실상사를 비롯하여 사단법인 한생명, 인드라망 수련원 귀정사, 작은학교, 인드라망 생협, 어린이집, 귀농학교, 우리옷 인드라망, 마을공동체 지원센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공동체들은 인드라망의 우산 아래 연대체를 구성한다. 전체 총회는 연간 1회 개최되며, 운영위원들이 수시로 회의를 한다고 한다.

한생명 왕영술 사무국장

이처럼 촘촘한 그물망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실상사라는 절이 있기 때문 아닐까? 실상사가 넉넉한 절은 아니지만 그래도 주변 삼만평이나 되는 농지가 있으니까 가능하지 않았겠냐고 질문했다. 

 

왕 국장도 여기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는 실상사의 스님들도 인드라망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이 스님들이 나중에 실상사를 떠나 다른 절에 가면 이 활동을 실천할 것이라고 했다.

 

왕 국장에게 실상사는 평지에 있는 절이어서 가능하지만 다른 절은 대부분 산중에 있는데, 산속의 땅을 내어 놓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왕 국장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최근 실상사와 같은 사업을 실천하는 사찰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사찰의 환경에 적합한 사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비단 불교뿐 아니라 최근에는 기독교 단체를 비롯한 다른 지역 단체들도 인드라망을 참고하기 위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한생명’이라는 이름은 이제 몇몇 사찰에서 생협을 의미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한생명이 실상사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왕 국장에게 실상사 주변에서 정착한 귀농인들이 공통의 힘을 발휘하는 조직적 활동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물었더니 아직 그런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대답했다. 다만 각자가 생명운동을 실천하고, 느슨한 네트워크를 유지하면서 서로 교류를 하는 정도라는 것이다.

그는 인드라망이 환경과 생명 이외에는 공유하는 이데올로기가 없고, 닫힌 공간에서 자족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네트워크를 지향한다고 말했다.

실상사는 지리산 한 가운데 있는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자라고 있는 인드라망이더욱 촘촘해지고 넓게 퍼져나간다면 언젠가는 우리의 팍팍한 삶에도 푸르른 생명의 그물망으로 다가올 수 있을 지 모르겠다. 

※ 기자는 6월5일과 9일에 실상사를 방문했다.

<정윤식 미디어 팀장>